눈에 보이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by Semilla

아이추판다님의 광어와 도다리와 함께 신경망의 꿈을을 보고 생각나서 적습니다.

옛날에 무슨 책이었는지 신문이었는지, 에서 잠을 잘 때 단계에 따라서 이런저런 뇌파가 나오며, 그 중에 무슨 뇌파가 나올 때가 제일 두뇌 기능이 좋다느니, 그래서 하품을 하면 이 뇌파가 나오기 때문에 좋다느니, 뭐 그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 때는 뇌파가 정확하게 뭔지도 이해를 못해서, 무슨 기나 오오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정말로 사람에게서 나오는 건줄로 믿었습니다.  (중, 고등학생때쯤이라서.. 순진했죠;;)

지금은 저게 EEG얘기였고, 뇌파라는게 정말 무슨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단순히 뇌 속에서 세포들이 작업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음을 피부 바깥에서 미세하게나마 감지해낸 것이라는 걸 아니까 저렇게 해석했던게 얼마나 우스운지를 알지만 그 때는 무척 신기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품을 할 때 무슨 파가 나온다는 건 대체 어떻게 나온 얘긴지 궁금합니다 (뭐 제 기억이 틀린 것일 수도 있지만).  눈만 깜박해도 EEG에 파장이 큰데 하품하는 동안 얼굴 근육의 움직임으로 인한 artifact랑 어떻게 구분한다고..-_-;;;;

살면서 소설이나 영화나 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어느샌가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스며들게 된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의식 세계가 있고, 그것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의식적으로 끌어내면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인간은 두뇌를 10%밖에 안 쓴다고 하는 미신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내가 더 있기에 나는 특별하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나까지 지금의 나에 더해지면 정말로 특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랄까요.

근데 사실.. 인간에게 실제로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정보처리 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미개척된 잠재력의 보고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체로는 내가 이미 마스터했기 때문에 따로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의식을 졸업해서 무의식적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능력들의 경우,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오면 오히려 능률이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숨쉬기.. 평소에는 생각도 않고 그냥 하고 있지만 의식하면 어쩐지 숨결이 더 거칠어지거나, 호흡이 어색해지지 않나요?  ..저만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뭐 다 그런 것도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축적했던 정보를 의식이 어쩌다가 깨달으면 유용하게 쓸 수도 있긴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게 있다고 해서 정말로 내 안에 또다른 내가 있어서 깨어있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닙니다.  그것도 결국은 다 '나'예요.  단지 내가 살아가면서 의식적으로 attention을 부여하면서 살면서 놓치고 있는 것들이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위안을 삼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언젠가 내 안의 또다른 내가 각성해서 내가 수퍼히어로가 될 것이라는 꿈은 인지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스르르 녹아버렸답니다.  알고 보니 눈에 보이는 내가 전부였고, 내가 모르는 나는 단순히 내가 딱히 신경쓸 필요 없는 부분을 뇌가 알아서 자동처리하고 있던 것뿐이예요 (로그인할 때 일일이 ID랑 비번 쓰는게 귀찮아서 자동로그인 체크하는 거랑 비슷하달까요).

대신 열심히 공부하면 무의식이 알아서 전문 지식을 알맞는 단위의 chunk로 처리해주어서 처음엔 단어며 표현이며 무작정 낯설어 막막했던 논문 읽기도 나중에 가면 인용된 사람 이름만 보고도 무슨 얘기가 나오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로도 지금 하는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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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새벽안개 2008/12/06 09:47 # 답글

    EEG가 신경세포들이 일하면서 나오는 노이즈 해석은 정말 그럴싸 하네요.
  • Semilla 2008/12/06 10:48 #

    사실 그렇잖아요.. 대체 안에서 뭐하는건지 들여다보고 싶은데.. 알 수가 없으니 귀 바짝 대고 대강 '이거 할 때는 이런 소리가 나더라...' '저거 할 때는 저런 소리가 나더라...'하고 때려잡는거...
  • etiole 2008/12/06 14:05 # 답글



    어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인지심리학 흥미롭네요~ 특히 '대체로는 내가 이미 마스터했기 때문에 따로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의식을 졸업해서 무의식적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라는 부분에서 '오오~' 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영역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때 정말 재미있는 거 같아요 :~)
  • Semilla 2008/12/06 15:53 #

    근데 저도 이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잘은 몰라요..
  • 루나리나 2008/12/06 22:54 # 답글

    앗...저도 의식하면서 숨쉬면 대체 언제 숨쉬어야 할지 애매해서 점점 혼란을 느껴요!!;; 하지만 생리통이 갑자기 심해지면 있으면 무의식이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의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원인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_-;;
  • Semilla 2008/12/07 04:07 #

    생리통..; 저는 일찍 오는 편이라 '아 손님맞을 채비해야겠다'하고 신호가 되어주죠...
  • SvaraDeva 2008/12/06 23:36 # 답글

    자동처리가 너무 늘어나서, 내가 무슨 일을 한 지 몰라서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요. T_T
  • Semilla 2008/12/07 04:08 #

    저도 그래요.ㅠㅠ.
  • 택씨 2008/12/07 06:53 # 답글

    하하.... 자동로그인;;
    간혹 의식으로 너무 많이 끌어오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하죠. 신경을 과하게 쓰면 위산이 과다하게 분비되니 말이죠. 무의식은 무의식대로 두는 게 순리인가봐요.
  • Semilla 2008/12/07 08:13 #

    아무래도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양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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