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해 의식이 쩔어. by Semilla

어제 교회에서 Operation Christmas Child에 대한 6분짜리 광고 영상을 보여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후원하는 사람들은 주로 백인이고
받는 사람들은 주로 유색인이라
은연중에 백인우월주의를 강화하는 이미지라고.
그 얘길 남편한테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냐고 하더라.
그리고 2부 예배 때 다시 보면서는
후원하는 사람들 중에 유색인이 나오거나
받는 사람들 중에 백인이 나오면 "봐, 다 그런거 아니잖아" 하면서 지적하고.

뭐 확실히 전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백인이 보내고 유색인이 받는 양상이 강조된 느낌이었는걸.
백인 아이들이 선물 받는 장면은 휙휙 지나가면서 흑인이나 동양인 아이가 받는 건 길게 잡아주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불쌍한 장면은 유색인종 아이들만 나왔어.

그리고 아마 그런 인상을 강조해야 백인들이 더 많이 후원할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래서 좀 심기가 불편했다.



오후에는 간만에 날씨가 좋아서 캠퍼스에 가서 사진 찍으려고 나섰는데
낙엽이 이미 많이 져버리고 바람도 너무 불어서 사진 찍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하여튼, 어느 건물의 옆에 옥상까지 이어지는 철계단이 있는데 접근을 막아놓지 않은 것을 보고
남편이 올라가길래 나도 따라올라갔는데
와아, 고소공포증!
근데 평소에 나보다 더 고소공포증 있는 남편은 잘만 올라가데.
역시 passion은 phobia를 뛰어넘는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나는 다시 내려갔다.

그 다음에 걸으면서 도보 옆에 주욱 평행주차 해놓은 차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없이 '평행 주차는 무서워'라고 말했는데
몇 초 뒤에 남편이,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얘기를 했는데, 그 말을 듣자 내 피해 의식이 넘쳐 올라서 "그런 말을 하면 우울증 있는 사람은 더 죄책감 느껴서 더 상처입는다" 고 얘기했고, 격려의 의미로 이 말을 꺼냈던 남편은 기분이 팍 상해서 서로 다투고, 캠퍼스 한복판에서 나는 서럽게 울고, 남편은 don't make a scene이란 말을 해서 나는 또 '내 기분보다 체면이 더 중요하단 말이지'하는 생각에 더 서럽게 울고.  결국 남편이 화를 버럭 내면서 '알았어 더이상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니가 나보다 더 교육 받았으니까 무조건 니 말이 옳다고 할게' 하고, 나는 '그렇게 하는 건 전혀 문제 해결이 안 돼, 그냥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는 거잖아, 비겁하게 덮으려고 하지 마, 서로 얘기해서 풀어야 하잖아' 뭐 그렇게 공방.
이건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우울증의 경험의 유무인데.  우울증이 없는 사람은 우울증이 있는 사람을 이해 못하고.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우울증 없는 사람이 일부러 나를 상처주려고 한 말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상처 받고.

이럴 땐 참 삶은 피곤해.

결국은 서로 사과하고 끝났지만
약간의 두려움은 남는다.
언제까지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며 사는 걸까.
이것 때문에 옛날의 나는 절대 결혼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남편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의 기쁨도, 가족에 대한 희망이 생겨서였는데.

결국은 그래.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나는 나쁜 사람이야,
나는 못난 사람이야,
라고 말해버리는 것은 결국 '난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발전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아무 노력도 소용 없어'라고 단정짓고 개선의 의지도, 노력도 포기해버리는 비겁한 짓이야.

이런 잘못을 했구나, 하고 반성하고
왜 그러게 되었는가 상황을 살피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다짐하는게 좋은 거야.

희망을 가지라고.
상황을 이해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그냥 쉽게 나를 condemn하지 말아.
도망치지 말아.

이렇게 힘겹더라도 조금씩 level up하다보면
의식적으로 피해 의식도 해제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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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ουτις 2009/11/03 08:00 # 답글

    아오... 사고의 흐름이나 다투는 양상이 너무 공감가요. ㅠ
    뭐 저는 만년 솔로입니다만. -_-;;;
  • Semilla 2009/11/03 08:22 #

    좋은 분 만나실 거예요.. 그리고 가능하면 다투지 않는게 좋지요.ㅠㅠ.
  • 2009/11/03 12:0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Semilla 2009/11/04 00:17 #

    감사합니다...!
  • Mannoya 2009/11/04 03:02 # 답글

    저도 피해의식 좀 있는데 ㅋㅋㅋ
    흠..내가 이런저런 것에 별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코멘트를 하는 거에 대해서 짚고 나오면 그거 자체에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공격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뭔가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좀 느긋해지면 좋은데 것도 잘 안되고..^^;
  • Semilla 2009/11/04 07:42 #

    느긋해지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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