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세척기 하나가 생활

옛날에 독일에 살 때,
엄마가 아빠한테 스퓔마쉬네 사자고 하시는 거 듣고 스퓔이 Spiel(놀기)인줄 알고 무슨 장난감인줄 알았다. 평소에 노는 걸 죄악시하던 엄마가 노는 기계를 사자고 하다니 의외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그게 Spühl(씻기)인 걸 알았다. 나중에 사기는 샀던 것 같다. 근데 그땐 아직 어려서 내가 쓰는 일은 잘 없었지.
한국에서는 식기세척기 없이 살았던 것 같다.

미국에서 대학교 2학년 2학기부터 내가 밥해먹고 살았다. 그때 살던 기숙사 타운하우스나 아파트에 식기세척기가 있었기는 한데, 많게는 8명인가 10명에서 적게는 4명이 같이 살았던지라 그리 자주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학원 1년 후에 결혼하고, 아파트에서 6년을 살았다. 아파트에 달린 식기세척기를 썼다. 낡은 모델이라 매우 간단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8년 전에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다. 가전제품도 거의 다 새로 마련했다. 그때 식기세척기는 Sears에서 산 Kenmore 것으로, 저가형 모델이지만 가장 싸지는 않은 모델로? 골랐던 것 같다. 버튼이 문 위에 달려서 닫으면 버튼을 누를 수 없는 구조가 있는 것을 보고, 나중에 아이가 태어날 때를 위해 일부러 골랐다. 여러 기능이 있었는데, 나는 그냥 늘 고온수로 세척하고 헹구는 옵션만 애용했다. 간혹 식기세척기 세척용 세제를 사서 헹구거나 필터를 청소하곤 했다. 나중에는 그런 세제 안 사고 그냥 가끔씩 식초만 넣고 돌렸다.

식기세척기용 세제는 한동안 액체로 된 걸 쓰다가 언제부터인가 포드로 바꿨다. 떨이로 세일할 때 왕창 사놓고 쓴다.

아래 칸에는 커다란 접시, 그릇 위주. 위 칸에는 컵, 작은 그릇, 플라스틱 용기 위주로 쌓는다. 남편과는 거의 맞춰져서 거의 같은 방식으로 놓는다. 가끔 서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얘기해서 고친다. 
시부모님 와계실 때 시부모님도 식기세척기에 그릇 넣으시곤 하시는데, 내가 추구하는 공간 효율과 안 맞아서 돌리기 전에 다시 내 방식대로 재정열하기도 한다. 단, 칼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리셨을 때는 내가 평정심을 잃고 대놓고 언짢아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집을 사기 전에는 미국에 오시면 주로 지내시던 시숙부님 집에선 언제나 칼도 넣고 돌려서 그랬다고 하시기에, 속으로만 그건 그집에서 쓰는 칼이 별로 안 좋은 거라 막 써도 되어서 그랬겠죠 했다. 아무튼, 그 뒤로 칼은 안 넣으신다.

식기세척기에 그릇 넣고 돌리고 다 되면 그릇 빼서 찬장에 놓는 게 꽤 큰 일이다. 아들내미가 깨어 있는 시간에 식기세척기가 열린 것을 보면 반드시 아들내미가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일부러 같이 식기세척기에서 깨끗한 그릇을 꺼내는 경우가 아니면 (그때는 아들내미가 아래 칸에서 그릇이나 식기를 하나씩 꺼내서 나에게 주면 내가 "spoon, 숟가락" "plate, 접시" 하는 식으로 교육의 기회 삼는다) 방해가 되어서 주로 아들내미가 자는 밤에 사용한다. 

그랬는데.
그 식기세척기가 어디선가 물이 새기 시작해 지하실이 엉망이 되었고. 모처럼 오클라호마로 가서 대학교 때 친구들 보려던 계획을 전면 취소하여 우리는 홈 디포에 가서 제습기계와 공업용 선풍기를 사서 밤새 돌리고 (대학교 가기 전에 화재 등으로 손상된 건물 재건하는 알바를 했던 남편인지라 이럴 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안다), 새 식기세척기를 주문했다. 이번에는 나름 중가형?으로 골랐다. 마침 독립기념일 세일도 해서 할인된 가격에. 식기 통을 문에도 달 수 있는 구조인데, 리뷰를 보니 그게 안 좋다는 얘기도 있긴 하지만 일단 써보고 결정할 생각으로. 일단 이번에도 우리가 최우선으로 본 조건은 버튼이 문 위에 달려있을 것.

당일 배송은 안 되고, 스테인레스 스틸 모델은 일주일, 검은색 모델은 이주 뒤에 배달된다길래 결국 스테인레스 스틸로 했다. 우리  부엌 가전제품이 다 검은색인지라 통일하고 싶었지만, 일주일이나 더 식기세척기 없이 살고 싶지는 또 않더라.

과연, 식기세척기 없이 사는 일주일은 불편했다. 설거지가 생기는 즉시 바로 바로 하면 좋은데, 애 보면서 하자니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고, 거기다 식기세척기 끊어 놓으면서 그 부분 전력도 차단해서, 설거지 싱크대 개수하는 부분의 음식물 쓰레기 파쇄기도 못 쓰고, 부엌의 뜨거운 물도 차단해서 설거지도 찬물로 하고, 전기포트로 물 끓여서 그걸로 마지막에 헹구느라 더. 옛날 사람들은 전기도, 상수도 시스템도 없이 살았는데 나는 참 배부른 소리 하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문명의 이기가 있으면 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튼. 드디어 오늘 새 식기세척기가 왔다. 주문할 때 20불 더 주고 옛날 식기세척기 치워주는 서비스로 골랐다. 도착하기 40분쯤 전에 전화가 왔고, 도착할 시간쯤 되어서 나는 부엌으로 통하는 뒷뜰문 열어놓고, 아들내미 안고 현관에서 그네를 타며 기다렸다. 곧 커다란 트럭이 도착했고, 먼저 한 사람이 부엌에 들어와 옛날 기계 꺼내가고, 그 과정에서 고양이 있냐며 못 나가게 신경도 써주고 (겁많은 케일리는 숨었지만 이나라는 호시탐탐 밖으로 나갈 기회를 노렸다), 두 사람이 새 기계를 들고 부엌에 내려놨다. 그리고 배달 끝나고 설문 전화가 올 건데, 5점 미만이면 fail로 간주된다는 얘기를 해서 나는 당연히 5점 주겠다고 말하며 영수증에 사인하고 보냈다. 한 20분쯤 뒤에 녹음된 설문조사 전화가 와서, 약속대로 난 다 5점을 줬고, 평가에 대한 부연 설명도 녹음을 선택해 고양이 신경써줘서 고마웠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정말로 고마웠으니까. 
(근데 그와는 별개로, 주문 당시에 홈디포 직원이 배달할 때 집에 어른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내가 집에 있다고 하니까 stay at home mom's the best!라고 말해서 기분이 상했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내가 집에 있는다고 전업주부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라 그냥 넘어갔다.)

남편이 퇴근 후 뚝딱뚝딱 새 식기세척기를 연결했다. 중간에 밖에 나가 외식하고 (부엌이 엉망이라 요리할 기분이 안 났다) 와서 아들내미 재운 후 다시 마저 연결하여 지금은 처음으로 돌리고 있다. 물은 안 새는 것 같다. 이래도 물 새면 정말... ㅠㅠ

식기통을 문에 다니까 채울 때 문을 활짝 연 상태에선 식기통이 뉘여 있어서 번거롭다. 아예 식기를 한꺼번에 몰아서 넣는 식으로 할 게 아니라면 식기통을 옮기거나, 아니면 매번 떼어내서 따로 식기를 채운 다음에 다시 부착하거나 해야겠지. 일단 어떻게 닦이나 보고.
일단 그릇이랑 접시랑 배치해 보니까 이전 것보다 배치가 쉬운 것 같다. 이런 건 눈으로 확인해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건데, 다행이다.

식기세척기 하나가 우리 생활에 참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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