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는 jury duty 후기 - 끝 문화/언어

월요일이 되었다. 그동안 8시 반까지 오라고 했었는데 이 날은 아홉 시까지 오라고 하더라.

그리고는 안에서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거의 열한 시까진가? 기다렸다. 우린 이 작업을 왜 금요일에 하지 않은 건지, 우리는 왜 아홉 시에 오라고 했는지, 투덜거렸다.

안에 들어가니 배심원 지시사항을 한 페이지에 하나씩 써서 프린트한 것을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더라. 그리고 원고측변호사가 먼저 closing argument를 하고, 그 다음에 피고측 변호사가 하고, 다시 원고측 변호사가 몇 마디 더했다.

내용은 대체로 지금까지 증인들이 한 주장의 요약. 내게는 피고측 변호사가, 원고쪽에서 불냈다고 주장하는 두꺼비집을 비슷한 모델로 상황을 재현해서 정말 나사가 도체의 절연코팅을 파손해 불을 낼 수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은 추측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원고측 변호사는 불에 탄 두꺼비집 사진을 강조하며, 그 나사 때문이 아니면 이게 왜 갑자기 불을 냈겠냐고 하더라. 나는 속으로, 불이 다른 곳에서 시작했어도 그렇게 탈 수 있는 것이고, 피고측 주장도 그렇다는 건데 마치 불은 두꺼비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확정된 것마냥 말하는 그 변호사응 보고 약았다고 생각했다. 배심원의 역할은 화재의 책임이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전기수리업체에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한쪽에 10명 이상의 배심원이 동의해야만 결정이 내려진다고 했다.

그렇게 모두의 변론이 끝나고, 역시나 판사는 대체 배심원으로 나를 호명했다. 이 때가 거의 한 시였는데, 배심원들에게는 점심으로 피자를 시켜준다고 하더라. 나는 어차피 못 먹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배심원들이 결정 내리는 동안 그날 쉬어서 출근하지 않은 법원 직원의 사무실에서 뜨개질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한참 뜨개질하다가 지겨워져서 폰으로 리디북스 들어가서 “결혼 장사”라는 로판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4시가 넘어가면서, 나는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혻니 나 여기 있는 거 잊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직원들에게 혹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냐 물었고, 한 직원이 어딘가에 전화해 보더니 아직 진행 중이라고 얘기해줬다.

다섯 시가 다 되면서 bailiff가 나를 데리러 왔다. Jury가 팽팽하게 갈려서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 법정에서 무엇이 진행될 때는 대체 배심원까지 모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도 들어가 앉아서야 대표 배심원(임산부)이 판사에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그럼 이제 원래는 법원이 문 닫을 시간이지만 판사의 재량으로 한두 시간 정도 배심원들이 더 토론할 수가 있고, 아니면 내일 다시 다들 나와서 재개할 수 있다고 하더라. 다들 좀 더 토론해보자고 했고, 나는 이번엔 다른 배심원실(아까 있던 사무실 쪽은 문을 닫았다)에서 기다렸다. 약 한 시간쯤 더 기다렸다가 다시 법정에 모이니, 배심원 대표가 아무리 더 논의해도 각 배심원의 결정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현 배심원단은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재판이 끝났다. 배심원실에 다시 들어가니 판사가 와서 재판이 이렇게 끝난 것을 아쉬워할 것 없다고 위로(?)하며 여러분이 성심껏 재판에 응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재판 당사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고. 좀 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다시 재판에 도전할 수도 있다고. 아마 그렇지 않을 테지만. 이분 판사 생활 수십년 동안 민사소송에서 이렇게 hung jury가 나온 거 세 번째 보신다던가. 그리고 그간 일을 쉰 것 때문에 직장에 제출할 서류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서류에 서명해줬다. 이저 법정으로 나가면 양측 변호사가 얘기하기를 원할 수 있는데, 그에 응하고 말고는 각자 알아서 하라고.

난 어차피 결정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얼른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얼핏 들으니 입장이 5-7로, 7명은 원고측 손을 들어줬다는 모양이더라. 피고측 입장에 공감했던 나로서는 의외였다. 어쨌거나 원고가 이기지 읺았으니 나로서는 결과가 나쁘지 않다. 내가 결정에 참여했더라도 결과는 비슷했을 테지. 어떤 분위기였는지, 누가 어느 쪽 입장이었는지 짐작도 안 가지만, 내가 Twelve Angry Men의 헨리 폰다처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생각하면 아마 피고측 증인이 남들이 증거 수집 못 하게 했다는 말을 다른 증인이 부인한 게 의심을 일으킨 게 아닌지. 원고측 변호사는 그 사람은 재판 당사자를 대표하지도 않는다는 걸 강조했지만 불이 난 원인이 두꺼비집이 아니면 온도 조절기 쪽으로 화살이 갈 테니까 그러는 게 이해가 되는 걸. 다들 점잖은 척했지만 피고측 찻 번째 증인이 그러더라. 다들 두꺼비집 구석에 몰려서 전기수리업체 잘못이라고 할 구실을 발견했다고 다른 건보지도 않았다고. 내가 보기에도 그 분위기가 그려지던걸.

재판이 끝나서 이젠 다른 사람돠 얘기할 수 있으니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대충의 상황을 설명하니 둘 다 두꺼비집보다는 온도 조절기가 불이 난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물론 내 설명 자체에 벌써 편견이 들어가 있었겠지만. 전기 쪽 일을 좀 해본 사람이면 금방 알 수 있다는 시아버지 말씀에, 배심원 대부분이 그런 경험이 적을 여자라서 더 이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재판에 대해 기사 같은 건 없나 찾아보다가 원고 쪽 트위터에서 궁시렁거리던 걸 봤다. 씁쓸했다.

아무튼, 앞으로도 계속 그 가게에 다닐 생각이니 나로서는 대체 배심원이었던 게 낫겠지. 참여했는데 완전히 피고 쪽으로 결정이 났으면 계속 다니기 괜히 껄끄러웠을 거야.

대부분 일주일 하루 일을 쉬느라 생계에 지장이 있음을 토로했으면서도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고 무조건 빨리 끝내기 위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도 고무적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내 첫 배심원 경험이 끝났다. 주말에 이메일로 종료 설문조사에 응하라고 하더라. 나는 time commitment에 대해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우편으로도 서신이 와서 난 그 이메일 내용과 같은 거려나 하고 열었는데 그게 아니라 판사가 보낸 수고했다는 메시지였다. 아 정말 졸아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긴다면 졸지 않기 위해 전 주부터 일을 줄이고 잠을 많이 저고 커피를 타 가고...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가선 그렇게 준비했는데 안 뽑힐 수도 있겠지.

아무튼. 앞으로 몇 년은 뽑지 말아 주세요...

덧글

  • 2019/09/02 22: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9/03 01:4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나녹 2019/09/05 23:22 # 답글

    수고하셨어요. 한 5년쯤은 연락 없었음 좋겠네요. 그나저나 배심원 중엔 역시 헨리 폰다 어르신이 최고...!
  • Semilla 2019/09/07 11:06 #

    그 영화 허구라지만 영화로서는 확실히 재밌었죠...
    배심원 뽑을 때 어떤 분은 20년만에 다시 하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오래 안 뽑히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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