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

우리 부모님은 sex에 대해선 입도 뻥긋 안 하셨다.
내가 결혼하기 직전까지 난 우리 부모님의 성 생활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을 정도로
나나 동생 앞에서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동생은 한 번 walked in on them 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만)
내가 결혼한 지금, 엄마한테 좀 물어봐도 당황해 하시면서 말 돌리기만 하신다.

어렸을 때의 첫 호기심은 당연히..
"아기는 어떻게 생겨?"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을 들었는데..
첫째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생겨"였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읽으니 김춘추와 문희는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애를 가져서 김유신이 불에 태워 죽이네 하는 쑈를 벌이더라.
그래서 결혼설 rejected.
둘째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면 생겨"였다.
그런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으니 스칼렛이 홧김에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더라.
남자 쪽은 사랑할지 몰라도 여자는 아닌데도 애기가 생겼으니 이 설도 rejected.
셋째는 "남자와 여자가 한 공간에서 자면 생겨"였다.
이것도 "바람.."에서 빌미를 찾았는데, 밤에 스칼렛이 남편이 자기에게 못 오게 베개 던지고 행패 부렸다는 대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게 국민학교 3-4학년 때쯤의 진도였다.
아직 "사랑"의 육체적인 의미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던 시기.
다만 "바람.."에서 버틀러가 스칼렛이 키스하고 싶어하는 입술을 만들고 있다나 뭐라나 그런 대목이 나왔을 때,
키스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그러다가 breakthrough하게 된 계기는..
친할아버지댁에 있던 야한 소설들.. 왕비열전, 금병매 같은..을 읽게 된 것과 (단지 '책'을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 범생 취급 받던 시절이니.. 아무도 내가 무슨 책을 읽는 지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뭐 나도 가능한한 그래주길 바랬기도 했지만)
Ace88시리즈 중의 Earth Children의 첫 두 권, The Clan of the Cave Bear와 Valley of Horses를 (번역된 제목은 "100만년 동굴"이니 "100만년 사랑"이니 했다) 읽게 된 것이었는데 처음엔 충격이었고 그 다음엔 그 흥분감을 즐겨서 자꾸 보게 되었으니 중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특히 Earth Children의 경우.. 1권에선 주인공 Ayla가 강간 당하는 거라서 그다지 아름다운 묘사는 없었는데 (사실 이 부분 읽을 때 난 Broud이 구체적으로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2권에선 크로마뇽인들의 카사노바 Jondalar가 성교의 기쁨을 모르는 Ayla에게 자상하게 처음부터 가르쳐주는 거라서 정말 완벽한 성교육 교과서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외에 또 기억나는 노골적인 성 묘사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건 성에 대한 묘사 때문이라기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던 것이라 가끔 그런 장면의 페이지를 누가 찢어갔다는 것 때문에 더 기억에 남지만.. 하여튼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arch Children처음 읽은 시기가 아마 5학년 때쯤이었을 거다...
이 단계에서 중학교 3년까지 보냈다.  아기는 남자와 여자가 어떤 짓을 하면 확률적으로 생긴다.는 결론과,
그 짓은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엄청 즐겁다 (Earth Children 관점)와 사랑하지 않아도 육체관계만 즐길 수도 있다 (태백산맥 관점)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그동안 '농구'만화라는 것때문에 관심 없었던 슬램덩크에 입문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순수하게 그 만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쯤에 PC 통신의 세계에도 빠져 있던 터라,
무심코 그 쪽 동호회에도 들어갔는데...
옴마야, 새로운 지평선이 열렸구나!

처음 "왕비열전" 같은데서 왕과 나인의 동침 대목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 죄책감, 흥분, 과 함께 처음엔 어느 정도의 거부감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 그 동안의 고정 관념, "섹스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하는 것"이 깨졌다는 것에 대한 유쾌함과 맞물린 호기심이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진도는 천천히 나갔다.  일단은 그냥 손잡고 키스하고 껴안는 데까지.  나중에는 "엑, 그게 가능해?"까지.  뭐 그런 식으로.. 점점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이 게 고등학교 때의 진도.
"아기는 안 생기겠지만 섹스의 즐거움은 사랑하는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정도로 압축할 수 있겠다.  물론 Y물이 현실적이지는 않다는 것은 숙지했고, 아직 실사에 대해서는 관심히 전혀 없었지만 (지금도 없지만), 동성연애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저 정도의 결론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섹스에 대해서, 사랑이 없어도 즐길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하면 더욱 즐거운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교 때는 우울증 때문에 성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다만 옛날에 2권까지밖에 보지 못했던 Earth Children을 원어로, 5권까지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동안 레벨업 한 인지 능력으로 능숙하게 읽으며, 상상하며, 즐겼다.  (이 시리즈, 선사시대 묘사는 참 인류학적으로 그럴싸하게 멋지게 하는데 성에 대한 묘사는 유치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연애하면서 몸이 한껏 달았는데 정작 결혼 날짜 잡으니까 기다림(anticipation)의 즐거움이 참을 만하게 해주더라.

이 때쯤 되어선 fiction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 잡지 같은데 나오는 전문가(?)들의 충고, 예비 부부를 위한 지침서, 등등 (내가 지금 있는 학교 신문에는 주간 성 상담 코너도 있다..-_-;;)을 읽어서 대강 거품은 빼고, 어느 정도 각오도 하고, 뭐 어쨌거나 "사랑하니까" 모든게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1년 전에 결혼한 아는 언니의 충고도 듣고.

그런데 처음엔 진짜 아프더라.  뭐 지금은 희미한 기억이지만.
첫날밤에는 섹스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고 할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참 만족감을 주더라.

결혼한지 2년 된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우리 둘 다 뚱땡이라서 좀더 파격적인 실험은 못하지만.
현재도 역시, "사랑이 있는 섹스는 즐겁다"라고 생각하고, 잠자리 테크닉이니 기교니-에는 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이 생각을 challenge하는 것들이 있으니...
가장 최근에는 어제 읽기 시작한 A Fool's Tale.
왕이 정략 결혼해서 적의 조카딸과 첫날밤을 치르는데 왕의 목숨도 구한 적이 있는 베프가 엿보고는 웃는다.
왕은 30세 정도.. 당연히 결혼 전에 이 여자 저 여자 많이 건드려 봤고, 취향도 정립해있는데 여자는 취향도 아닌데다 딱 보니 처녀란 걸 알겠다고, 왕이 참 지루하고 재미없겠다고 웃는 것이다.

"섹스의 즐거움의 조건"에 난 지금까지 "정신적인 사랑"에만 신경을 썼는데 여기저기서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한 기술"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물론, 단지 사랑한다고 해서 무식하게 한다거나 하면 고통이 더 클 테니 즐거움은 느끼기 힘들겠지.
사랑이 없는 관계에서라면 아무래도 쾌락의 source는 sensation일 수밖에 없는 것일 테고,
그러면 "기술"이 그 차이를 만들긴 하겠지.

이를 테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섹스의 즐거움은 top-down processing에 기반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의 즐거움은 bottom-up processing에 기반한다- dichotomizing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리고 서로가 mutually exclusive하지 않다는 것도 덧붙여서, 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남편과 나는 사랑하니까 괜찮아.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게 되는게 바로 이 "기술"이란게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하는 것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난 처음이랑 지금이랑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워낙 둔해서 그런 거겠지만.  어쨌거나 기왕 경험은 쌓는거, 레벨업 하면 좋잖아.  근데 왜 경험치가 쌓이는 것 같지 않지?  이거 unlock하는 퀘스트를 어딘가에서 안 받은 건가?

여기서 고민은 시작되는 거다.  사랑하니까 생기는 섹스의 즐거움은 이제 taking for granted.  여기에 좀더 능숙한 즐거움도 더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나한테는 이 스킬이 원래 없는게 아닌가 하는.

마치, WoW에서 지금까지는 그냥 내 마음대로 캐릭을 키우면서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기왕이면 좀더 효율적으로 플레이해볼까 하고 장비나 스킬을 고민하는 것과 비슷한 걸까.
그래도 WoW의 경우 내가 아주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한 번 실수하면 다음엔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아 이 때는 이런 기술로 받아치면 되겠구나, 아, 이 때는 이래야겠구나, 하고 성장하는걸 내가 스스로 알 수 있는데
섹스에 대해선 전혀 모르겠다.....

5년쯤 되면 달라지려나?

by Semilla | 2008/06/28 04:09 | 잡담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semilla.egloos.com/tb/52802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Mannoya at 2008/06/28 08:44
꼭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아요. 경험이 많은 사람들도 정말 즐거웠던 섹스를 말하라면 손에 꼽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런 걱정은 안하셔두 될듯^^
두 사람이 편안하게 깊은 대화를 나누고 찾아보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때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전에 카마수트라에 대해 찾아본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테크닉에 치중한 야한 책 정도로 생각하고 있더군요. 육체적 쾌락을 위해 파트너를 바꿔가며 탐닉하는것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런 "연구를 통한" 제안서들을 읽어보며 두 사람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보는게 훨씬 건전할텐데 말이지요. 예전에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다양한 자세의 시도를 포르노의 저질로 취급하는 걸 보고 사회적 분위기나 통념도 한몫하는겐가 싶었지요.
Commented by Semilla at 2008/06/28 15:25
그렇죠.. 걱정 할 필요 없는데 괜히 귀가 너무 얇은 것 같아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